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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창이 있으나마나 한 이 길갓방에서 나는 컸다
외짝문 외엔 따로 문이 없어
누가 밖에서 숟가락이라도 걸면
숨 막혀 죽을 판이었지만, 빨려 들어온
동네 소문이 나갈 데를 못 찾고 흙벽에 스며들었다
귀 달린 구렁이 얘기, 감천사 새끼여승 얘기
며느리 젖에 난 종기 쪼옥쪽 빨아냈다는 갈재 할배 얘기
빤스 벗기 고스톱도 넌덜머리날 쯤
저것덜 땜시 동네 아덜뜰 다 베리겄다고
몇 차례 눈이 더 내리고, 복사꽃 살구꽃이 피었다 지고
다시 펑펑펑 주먹눈 쏟아졌다
토란대 넣고 끓인 개장국을 양푼째 퍼먹으며
생솔 태운 냇내를 깔고 뭉개며
내 뜻과 상관없이 문틈에 끼었다 덜덜 빠져나오는 시간을
군둥내나는 묵은지에 얹어먹으며
불티재가 뜬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뭔 꿍꿍이냐, 니가 이런다고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미륵님이 환생을 허냐
오그린 무릎을 펴며 주룩주룩 작살비가 내리고
비 들이친 윗목을 걸레로 닦아내며
하룻밤 새 이삼십 년을 폭삭 늙기도 하며
토끼장 밑구녁에 대갈통 처넣었다가 디질 뻔한 사정을
킥킥대며, 아궁이 속에 식어빠진 감자알들을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끄집어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얼마나 눈부실지
참말로 봄이 오긴 올 건지
눈알 쓰리게 고민도 못해 봤지만,
밥 짓는 냄새에도 고개가 숙여지는 삶은
논밭일에 치어 더 이상 하얀해질 가망이 없는
얼굴들처럼 내 소망 바깥에 있었고,
농민신문지로 도배한 벽에 손톱금 내어 새긴 백합 한 송이
쪽창 두드리던 그녀의 품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었던 날들이 잠시 환해지기도 했지만,
양푼에 붙어 딱딱해진 밥알들 떼내며
뒤안 대숲을 차오르는 참새 떼 소리를 가슴 안쪽에
쑤셔 박으며, 계절이 또 오고 떠났다
서까래수수깡에 붙은 흙조차 떨어져 하늘이 새는 길갓방
길지 않은 세월 무덥고 지루한 날들이 많았는지
쪽창도 기우뚱 몸을 틀었다
된장 풀어 끓인 아욱국같이 어질고 싶었던 날들
방 구석구석에 벗어놓은 날개옷들
거미줄 뒤집어쓴 것 같은 서까래나이테의 잔금들을
싸리비로 쓸어낸다
(그림 : 김인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