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병초 - 봄편지
    시(詩)/이병초 2014. 7. 5. 17:05

     

    쪽창이 있으나마나 한 이 길갓방에서 나는 컸다

    외짝문 외엔 따로 문이 없어

    누가 밖에서 숟가락이라도 걸면

    숨 막혀 죽을 판이었지만, 빨려 들어온

    동네 소문이 나갈 데를 못 찾고 흙벽에 스며들었다

    귀 달린 구렁이 얘기, 감천사 새끼여승 얘기

    며느리 젖에 난 종기 쪼옥쪽 빨아냈다는 갈재 할배 얘기

    빤스 벗기 고스톱도 넌덜머리날 쯤

    저것덜 땜시 동네 아덜뜰 다 베리겄다고

    몇 차례 눈이 더 내리고, 복사꽃 살구꽃이 피었다 지고

    다시 펑펑펑 주먹눈 쏟아졌다

     

    토란대 넣고 끓인 개장국을 양푼째 퍼먹으며

    생솔 태운 냇내를 깔고 뭉개며

    내 뜻과 상관없이 문틈에 끼었다 덜덜 빠져나오는 시간을

    군둥내나는 묵은지에 얹어먹으며

    불티재가 뜬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대체 뭔 꿍꿍이냐, 니가 이런다고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미륵님이 환생을 허냐

    오그린 무릎을 펴며 주룩주룩 작살비가 내리고

    비 들이친 윗목을 걸레로 닦아내며

    하룻밤 새 이삼십 년을 폭삭 늙기도 하며

    토끼장 밑구녁에 대갈통 처넣었다가 디질 뻔한 사정을

    킥킥대며, 아궁이 속에 식어빠진 감자알들을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끄집어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얼마나 눈부실지

    참말로 봄이 오긴 올 건지

    눈알 쓰리게 고민도 못해 봤지만,

    밥 짓는 냄새에도 고개가 숙여지는 삶은

    논밭일에 치어 더 이상 하얀해질 가망이 없는

    얼굴들처럼 내 소망 바깥에 있었고,

    농민신문지로 도배한 벽에 손톱금 내어 새긴 백합 한 송이

    쪽창 두드리던 그녀의 품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었던 날들이 잠시 환해지기도 했지만,

    양푼에 붙어 딱딱해진 밥알들 떼내며

    뒤안 대숲을 차오르는 참새 떼 소리를 가슴 안쪽에

    쑤셔 박으며, 계절이 또 오고 떠났다

     

    서까래수수깡에 붙은 흙조차 떨어져 하늘이 새는 길갓방

    길지 않은 세월 무덥고 지루한 날들이 많았는지 

    쪽창도 기우뚱 몸을 틀었다

    된장 풀어 끓인 아욱국같이 어질고 싶었던 날들

    방 구석구석에 벗어놓은 날개옷들

    거미줄 뒤집어쓴 것 같은 서까래나이테의 잔금들을

    싸리비로 쓸어낸다

    (그림 : 김인수 화백)

    '시(詩) > 이병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초 - 삐비꽃  (0) 2014.07.05
    이병초 - 마늘  (0) 2014.07.05
    이병초 - 또랑길  (0) 2014.07.05
    이병초 - 명당明堂  (0) 2014.07.05
    이병초 - 써레  (0) 2014.07.05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