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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적소(謫所)에 들다시(詩)/이지엽 2014. 4. 8. 13:48
푸르게 금 긋는 대밭 머리를 지나면
명치 끝에 걸리는 불혹
겨울의 입구에 선 사랑이 보인다
눈이 내리는 남도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섬, 영산벌 가득히
물보라 날린다 부서져 흩어지는 저 욕망의 흰 파편들
온 산의 거친 숨소리가 뒤척이며 돌아눕는다
보았던가 그때, 절명의 한 순간을 위하여
한 세기의 노을을 바스라지도록 끌어안고
느낌표처럼 쓸쓸하게 추락하던 한 사내
죽어서도 제 육신에 새순을 밀어 올리는 고목 등걸, 위에도
연하여 며칠 눈이 또 내리고
이윽고는 네 처녀림(處女林)에 돛을 내리리라, 편지를 쓰는 저녁
나는 은백색의 곰 한마리가 되는 꿈을 꾸곤 했다
보이는 모든 세계가 눈보라 속 아득한 경계로 사라져
더러 미명의 열꽃으로 깊이 앓으리라
유년의 대장간 소리가 그리운 겨울 한낮
걷다가 웃다가 언뜻언뜻
어머니를 만나기도 하면서,
또 말없이 보낸 하루
꽃피울 무엇이 아직 남아 한 그루 나무 되어 서는가,
저 뒤틀린 지상의 가슴에다 누가 화살을 쏘고 있는지
백련사 동백나무에 가볍게 가 닿는 풍경(風磬)소리,
선명하게 저리 붉다적소(謫所) 죄인(罪人)이 귀양살이 하는 곳
(그림 : 김상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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