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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밥이 되겠습니다시(詩)/이향아 2014. 3. 18. 18:43
밥이라는 말이 혹시
도망가지 못할 막다른 벼랑처럼 보일지도 몰라서
내가 불쌍하거나 몽매하거나 캄캄하게 보일지도 몰라서
이리저리 궁리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냥 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예 밥이 되겠습니다.
예, 밥이 되겠습니다
복복자 무늬 좋은 하얀 사발에
대나무 주걱으로 소중한 낱알
목숨의 주식인 눈물이 되겠습니다
주체스러워도 벗어 던질 수도 없는 몸
그 몸을 흐르는 피가 되겠습니다
종이 되겠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떡보다 술보다도 절박한 밥이
한 잔의 차보다는 한 대접 국밥
나는 걸죽한 밥이 되겠습니다.
밥이 되는 내가 창피한가요.
이런 나를 상종하기 슬프신가요
살아서 날마다 밥이나 죽이는
밥술이나 먹는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아는 것이 오로지 밥밖에 없는
그런 세상보다야
열 번이나 백 번이나
밥이 되겠습니다(그림 : 변응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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