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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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시(詩)/장석남 2014. 5. 18. 00:55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발걸음은 결국 바다에 닿는 것이 아닌가. 바다에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도 우리들 넋은 결국 바닷가에 머물며 물 빠진 해변을 밤새 걷지 않던가. 내가 밟고 다녔던 바닷길들 때로 저녁 밀물 위에 음악처럼 노을로 떠서 출렁이고 그 노을 빛을 딛고 오라 하는 이가 있어서 수평선 너머의 바다는 가장 간절한 망설임의 표정으로 지금 내 속으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고. 바다는 매번 너무 젊어서 지금 바다에 비가 온다. 그런데 저것은 비 이외(以外)의 또 무엇인고. 바다는 매번 너무나 젊어서 저것은 파도 以外의 또 무엇인가. 바다에서 거두어 오는 발걸음은 늘 발걸음 하나만은 아니어서 바다 또한 더 멀리 아주 가지 않고 돌아오기를 아직도 너무 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림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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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배를 밀며시(詩)/장석남 2014. 5. 18. 00:48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그림 : 김상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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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꽃이 졌다는 편지시(詩)/장석남 2014. 2. 3. 20:40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 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 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 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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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배를 매며시(詩)/장석남 2014. 2. 3. 20:38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앉아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 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그림 : 박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