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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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오래된 편지시(詩)/이대흠 2014. 9. 7. 01:38
큰형은 싱가포르로 돈벌러가고 물레에는 고지서만 쌓였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어머니는 어깨 넘어로 겨우 한글을 깨쳤지만 혼자서 편지 쓰기에는 무리였다 보이러공인 큰형 덕분에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어머니가 입으로 쓰시는 편지를 양면지에 옯기는 일을 하였는데 맞춤법도 없는 편지는 큰형을 곧잘 울리고 큰 악으야 여그도 이라고 더운디 노무 나라에서 얼매나 땀 흘림시롱 고상하냐? 니 덕분에 아그들 학비 꺽정은 읎다마는 이 에미가 니럴 볼 면이 읎따 늑 아부지도 잘 있고 아그들도 잘 있시닝께 암꺽정하들 말고 몸조리나 잘 하그라 저번참 핀지에 내 물팍 아푸냐고 물었는디 내 몸뗑이는 암상토 안항께 꺽정을 하덜 말어라 그럴때면 나는 편지에는 계절인사가 있어야한다고 우겨뎄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속닥새가 우는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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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아우시(詩)/이대흠 2014. 9. 7. 01:32
내 동생, 업고 노는데 울기만 하고 숨박꼭질하면 나는 자꾸 술래만 되고 오징어가이생도 못하고 떼어 놓으려 집으로 돌아오니 둘데가 없네 마루에 두자니 토방으로 굴러버릴 것 같고 방에다 두자니 아무거나 망가뜨릴 것 같고 우는 아이 어르고 달래 기둥에 꽁꽁 묶어둔 뒤 울음소리 들리기 전 밖으로 달음박질 에비오제, 버짐 많던 동생에게 먹이던 달고 고소한 그것을 나도 먹고 싶은데 어머니는 어디다 감추었는지 몰래 꺼내어 동생만 주고 몇 날을 뒤진끝에 장롱 깊숙이 숨겨져 있던 반통쯤 남은 그것 찾아 한꺼번에 먹어 버리고 나는요 배가 아파 데굴데굴 뽀빠이, 어머니가 일하러 가며 사준 두 봉지 동생이랑 사이좋게 나눠 먹으랬는데 내 것 다 먹었어도 입 안엔 침 가득 병원 놀이 한다며 동생을 환자로 눕혀 놓고 환자가 뭘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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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밥과 쓰레기시(詩)/이대흠 2014. 9. 7. 01:28
날 지난 우유를 보며 머뭇거리는 어머니에게 버려붓씨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과자를 모으면서 멤생이 갖다줘사 쓰겄다 갈치 살 좀 봐라, 갱아지 있으먼 잘묵겄다 우유는 디아지 줬으먼 쓰것다마는 신 짐치들은 모타 가꼬 뙤작뙤작 지져사 쓰겄다 어머니의 말 사이사이 내가 했던 말은 버려붓씨요! 단 한마디 아이가 남긴 밥과 식은 밥 한 덩이를 미역국에 말아 후루룩 드시는 어머니 무다라 버려야, 이녁 식구가 묵던 것인디 아따 버려불재는... 하다가 문득, 그래서 나는 어미가 되지 못하는 것 (그림 : 진미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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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베릿내에서는 별들이 뿌리를 씻는다시(詩)/이대흠 2014. 9. 6. 00:45
이 여윈 숲 그늘에 난꽃 피어날 때의 꽃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에서 당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세월이 어떻게 동그란 무늬로 익어 가는지 천천히 지켜보다가 달빛 내리는 언덕을 쳐다보며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고통과 꽃의 숨결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가만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먼 데 있는 강물은 제 소리를 지우며 흘러가고 또 베릿내 골짜기에는 지친 별들이 내려와 제 뿌리를 씻을 것이다 그런 날엔 삶의 난간을 겨우 넘어온 당신에게 가장 높은 난간이 별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있는 새들은 하늘 한 칸 얻어 집을 짓는 것이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싶다 서러운 날들은 입김에 지워지는 성에꽃처럼 잠시 머물 뿐 창을 지우지는 못하는 법 우리의 삶은 쉬 더러워지는 창이지만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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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애월(涯月)에서시(詩)/이대흠 2014. 6. 9. 19:01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 부터 달의 빛나지 않은 부분을 오래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 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 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 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 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그림 : 차일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