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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오지 못한다' 하는 말을 철없던 내 귀로 들었노라. 만수산(萬壽山)을 올라서서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도 오늘날 뵈올 수 있었으면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돌아서면 무심타'고 하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을 알았으랴. 제석 산 붙는 불은 옛날에 갈라선 그 내님의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그림 : 박연옥 화백)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축 업은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 세상의 네 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들에 헤메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 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축 업은 베겟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그림 : 박연옥 화백)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래 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 없이 잊고 말아요 (그림 : 박연옥 화백)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그림 : 박연옥 화백)
어룰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 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닯이 고운 비는 그어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그림 : 박연옥 화백)
생각의 끝에는 졸음이 오고 그리움의 끝에는 잊음이 오나니 그대여, 말을 말아라, 이후부터 우리는 옛낯 없는 설움을 모르리 (그림 : 박연옥 화백)
실버드나무의 거무스레한 머릿결인 낡은 가지에 제비의 넓은 깃 나래의 감색 치마에 술집의 창 옆에, 보아라, 봄이 앉았지 않는가 소리도 없이 바람은 불며, 울며 한숨지어라 아무런 줄도 없이 섧고 그리운 새카만 봄밤 보드라운 습기는 떠돌며 땅을 덮어라 (그림 : 박연옥 화백)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 지고 잎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그림 : 박연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