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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 종이배를 띄우고 싶었다시(詩)/시(詩) 2023. 8. 13. 20:48
티브이에 나오던 광고영상이 신기하기만 하던 시절
쥬시후레쉬인가하는 껌 선전에서
흰색의 예쁜 중절모를 쓴 처녀가 초록빛 시냇물 위에
종이배를 띄우는데
코스모스 한 송이를 태웠을 것이다
동승한 코스모스가 돛이 되어 흘러가다가
어디로 정착하였는지
결말을 보지 못하였음이 내내 궁금하였는데
코스모스는 해마다 피어
그 때 그 일을 기억하는 눈치여도
세월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흘러만 갔을 뿐
빛깔도 바랜 어느 시인의 옛 시집에서
대야 위에 종이배를 띄우고 싶어졌다는 문장 하나로
그 때 그 종이배가 생각났으나
한 번도 귀 기울이지 못한 무심함으로
아직도 정착하지 못한 삶
그때는 그 여자처럼
예쁜 색종이로 접어
누군가에게 닿을 종이배를 띄우고 싶었다
적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시냇물을 타고 온 종이배의 사연을 알아차리고
무거운 기운에 힘들어하는 종이를 펴서
숲 속 가장 넓고 깨끗한 잎사귀 위에 말려
깨알같은 글씨로 답하여 줄 사람 있는가
넓은 강으로 떠내려가 허둥지둥하기 전에
나를 안아 준
같은 호흡으로
연주하고 있을 내 남자이련가(그림 : 정혜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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