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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 따뜻한 반어법시(詩)/시(詩) 2023. 4. 18. 12:11
다음 해, 꽃이 피면
당신의 셔츠 당신의 벨트 당신의 구두를 잊을 거야
오래된 주소 즐겨 쓰던 형용사와 편지 속의 마침표를 꼭 잊을 거야
더 이상 당신을 감출 행간이 없으므로
눈동자를 잊고 눈물을 덮던 눈꺼풀도 잊어버리고 나면
당신이 사라지는 것과 기억이 사라지는 것 중에서 어는 쪽이 더 슬픈 일이 될까
잊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슬픈 기억들
어두운 꽃송이 아래서
잊고 또 잊으면
나의 하루는 터무니없이 행복해지고
나비들이 죽는 계절에는
꽃을 잊은 채
이별에도 희망을 걸 수 있게 될까
다음 해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돌아와 꽃이 피는 날
나는 어떻게 해야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할까, 천만다행으로
(그림 : 안기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