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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할매, 시골장터 책방에 들러 사온
전과지도서 내게 건네시면서
얘야, 오늘 말이다
이 책장(冊張) 위로 가게
심장처럼 품에 안고
십리 길 걸어 왔단다 안 그러면,
책속에 잠자던 말들 저 아래로 다 새어
개울물 가재 밥이 되어
배고픈 우리 새끼 어쩌라고
당신 넓적다리 내 까까머리 베개로 내주시고
구운몽 장화홍련 홍길동전 병풍처럼 둘러치고
전과지도서에 담긴 그들의 명사며 동사며 토씨를
재미나게 차례차례 불러내
내 가슴 배불렀고 내 머리 감겼다
울 할매, 군불에 따끈한 아랫목 청국장처럼
구수한 이야기 들려주기 위해 이들 영상들을
당신이 사온 전과지도서에 담가 두신 것이다
나는 시 쓰는 세간 살림들을 울 할매처럼
내 가슴 내 머리에 빼곡히 새겨두었다가
막상 시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모두가 개울물 가재 밥이 되고 만다
아 나는 울 할매가 구운몽 장화홍련 홍길동전을
불러내 술술 이야기하듯 내 이야기 언제 쓰려나
아니 버리고 담그고 버리고 또 담그지
모두가 개울물 가재 밥이 된 텅 빈 책속에
내 밀화(密畫)를 발효시켜
숙성한 청국장처럼 냄새나는
할머니, 나는 보고 싶다
책장 한 장 한 장이 울 할매 그림자로
이 세상 곳곳에 돌아다니는 것을
(그림 : 윤문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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