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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만 - 이중섭의 집시(詩)/시(詩) 2022. 11. 3. 15:44
섶섬이 보이는 돌담집에 가면
어른도 벌거벗고 아이가 됩니다
파도는 이중섭이 즐겨쓰는 붓
파도 끝에서 허공으로 몸 뒤집는 그의 붓은
은종이에 엎질러진 바다의 내면
거기에 갇힌 건 그가 처음입니다
벌거벗은 아이가 모래판에서 해와 씨름을 하면
섶섬이 울룩불룩한 파도를 황소처럼 몰고 와 응원합니다
그림자가 돌담에 쌓여 파도가 높아지면
집게발에 잡힌 그리움이 파도 끝에서
해 질 때까지 해 질 때까지 물눈물 피웁니다
그가 마련한 집은
코딱지만한 은박지가 고작이지만
바다는 한 번도 좁다 한 적 없습니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코흘리개 눈빛
오종종한 은박지에 맡겨놓고
유채만 저 멀리서 손 흔들고 있습니다
섶섬이 보이는 낮은 돌담집에 가면
수만 페이지의 파도를 넘기다
크레용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노을
아이들 얼굴에 덧칠하느라 홀딱 벗은 사내
어쩌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림 : 이중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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