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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희 - 바람의 이분법시(詩)/시(詩) 2022. 8. 7. 21:28
햇살 맑은 날이면
투명한 ㅂ은 공중에 유리알 같은 깃발을 내걸었다
오래전 골목 끝으로 낡은 단어장을 던진 소년을,
바람은 알고 있었다 마을회관 안쪽 누군가의
등 굽은 무용담도 이젠 낙엽만큼 효험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너라는 모서리에 묶여
백기처럼 펄럭이던 꽃무늬 손수건, 알고 보면 그 모두는
ㅂ이 너의 오후에게 저지른 수줍고 향긋한 만행이었다
투명한 것들이 새떼처럼 불어왔다 떠나간 날이면
저녁상 물린 창밖 나뭇가지 어디쯤에 이미 그가 와 있었다
ㅂ은 오래 말을 아꼈고,
이따금 그녀 목 안쪽에서 습기 밴 바람 소리가 걸어 나오곤 했다
아침이면 남쪽 창을 열고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먼 길로 떠나던 무수한 바람들이
사나흘씩 ㅂ의 품에 갇혀 향긋한 고백들을 들려줘야 했다
신성리갈대밭에 가보면
태양의 세 번째 심장과 사랑에 빠진 바람이
노을 물든 서천을 두루마리처럼 언덕에 펼쳐놓고
붓보다 고운 갈대로 길고 긴 편지를 쓴다
신성리갈대밭 :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에 위치한 갈대밭
(그림 : 최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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