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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 - 사랑, 지난날들의 미몽시(詩)/시(詩) 2022. 5. 27. 10:11
밤보다 깊은 새벽
하늘빛은 어둠의 휘장을 둘러 되레 뽀얀 신부 같아
사방 축복의 고요와 적멸은 청사초롱 한데
나는 자다 깨다 문득 비끄러매진 인연의 매듭을 생각한다
나보다 더 골똘한 조막손 별이 어둠을 그러모아
키 작은 지붕들을 덮어주고
지붕 아래 누운 고단했던 이들의 하루를 다독이며
지우고 다시 쓴 문장처럼 반짝일 때
녹아내리는 촛농 같아서
뜨겁지만 잡으려 들면 금방 식는 게 사람 사이라고
데일 듯 타오르다 금방 식어버린 인연들이 몇이나
내 불면의 밤과 함께했던가
사랑은 때로 저 혼자 타오르는 불이었기에
이제 타다만 시간의 불씨를 쟁여
마음 빚지고 가는 일
지나간 것들의 변명에 기대어
더는 상처라 부르지 않을 일
어떤 사랑도 어둠 없이 빛나진 않았다
어떤 서사도 밤의 서정 속에선 가지런한데
나 왜 이러고 있나
빙산의 일각에 난파된 배처럼
도사린 빙벽을 뒤늦게 발견한 조난자처럼
모든 난항(亂杭)을 웃으며 건너가리라 다짐하는
몽환의 산책자처럼.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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