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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 차의 속도를 붙이다가시(詩)/이태수 2022. 4. 20. 19:23
차의 속도를 붙이다가 문득
기계는 무섭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고장이 나지 않는 한
기계는 정직하기 때문에. 정직한 건
무섭다는 생각을 굴리면서
차의 속도를 줄이다가
정직하지 않은 것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과
마주친다. 날이 갈수록 이지러지면서도
이즈음은 결벽증이 농도를 더하고 있음을,
이 세상이 점점 더 뒤틀리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급커브를 꺾는다. 차는 정직하게
급커브를 돈다. 세상에는 뒷문도 있고,
사람들이 이따금 안개 너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도 정직한 건 무섭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정직하지 않은 것은
더욱 무섭다는 생각을 떨굴 수가 없다.
차의 속도가 붙는 동안
고장이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갈 곳이 없으면서도 달리고 또 달리면서
나는 그 아슬아슬하고 풀리지 않는
거짓말 사이에 말뚝을 박는다.
차의 갖가지 부품들이 하얀 눈을 뜨고
내 생각의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림 : 허필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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