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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경 - 통화권 이탈시(詩)/시(詩) 2021. 12. 21. 09:43
파도, 그 시퍼런 울렁임을 베고 누워
시간을 되새김질해요
천 개의 잎사귀마다 색색의 물을 들이고
물든 잎마저 말없이 자취를 감추면
우듬지 가지 사이사이 일제히 조등을 내걸던
11월의 착한 감나무가 까아만 어둠 속에서 솟아올라요
소멸 직전에서야 빛을 발하는 찬연한 아픔
생성과 소멸, 모든 것이 찰나인가 봐요
저마다 존재의 의미가 부여된 땅 위의 모든 것들을
밀쳐내며 앞으로 앞으로 잘도 내달리네요
이 보셔요
거기, 이쪽저쪽 뺨을 후리는 손매가 보통이 아닌걸요
뱃머리 휘어잡고 흔들던 파도의 손놀림과
바람의 슬픈 노래가 당신의 대답이었군요
주머니에 넣어둔 전화기에 생각 없이 시선이 꽂히네요
폴더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을 눈치채진 못했겠죠
축 늘어진 당신의 염려는 주변을 맴돌다 웅크려 앉았고요
내가 알았던, 나를 알았던 이전의 모든 것들 또한
꽁꽁 얼어 버렸겠죠
망망대해에선 마음만 길을 잃는 게 아닌가 보더라고요(그림 : 나미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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