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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지붕의 겨드랑이까지 구석구석 발라질 때쯤
그의 뒤통수로 그림자는 슬적 다녀간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뗀다저물기 시작한 노을이 그의 머리를 툭 건드릴 때마다
기억의 살점은 슬그머니 떠나갔고
그에게서 아내와 자식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식대와 숙박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외양간에 암소 한 마리는 덕분에 살판이 났다그의 허리를
꺼부정하게 길들이던 소주병 하나가 속이 다 털린 채
언짢은 표정으로 세월의 가면을 쓰고 있다
아내와 아주 헤어질 때 꼭 전하고 싶다던
그 때 그 비밀스런 그의 말들은 절대
아무에게도 전해질 일이 없을 것이다올해도
바람은 노을과 어둠의 틈 사이를 뒤지고 있다
콩깍지 안에서 콩알이 툭 튕겨져 나간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잡아뗀다(그림 : 박운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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