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삽날을 베어 먹은 공터 한켠이 들춰진다
단단한 지표면이 순간의 삽질에 풀려나고
오래된 아집들이 잘게 잘려져 한 삽씩 떠 올려진다
이제 머지않아, 이 속엔 또 다른 생태계가 들어찰 것이다
이 속으로 함구 될 세월 저쪽의 사연들은 나와 구면이다
나도 한때는 주유소 한켠에서 잘 삭은 유전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분간 버스회사의 직원이다
전화기 속으로 연실 드나드는 석유회사들
공터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몇 개의 질문과 도면들
공사를 한다는 것은 일상의 밀린 청구서들을 허무는 일이다
잘 풀리지 않는 근심의 모서리를 곰곰 찾는 일이며
아직 완공되지 못한 내 안의 희망 한 채 건축하는 일이며
그 일상의 머리맡에 내 노모의 알약도 장만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몇 개의 날카로운 냉기도
이곳을 통과하면 모두가 잘 데워진 추억이 될 수 있음을
땀에 젖은 인부 하나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한 개비의 호흡을 피워 날린다
그의 이마 위에서 겨울 햇살이 잠시 허리를 편다
(그림 : 송주웅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문자 - 신두리 (0) 2021.04.24 황금찬 - 봄 밤 (0) 2021.04.22 전성호 - 새벽 밀양역 (0) 2021.04.21 표성배 - 내 봄은 (0) 2021.04.18 윤석정 - 마흔 (0) 2021.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