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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란 바지랑대로 후려치고 뭉툭한 빗자루로 쓸어 담아
방앗간에서 몇 병의 참기름과 바꿔왔던 때가 있었다
채마밭에 자갈을 들춰 보면 손톱만한 공벌레들이 꿈틀거렸고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커다란 참깨들이 기어다녔다
술만 마시면 TV 브라운관을 맨주먹으로 박살내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슬픈 참깨였음을
글도 떼기 전에 나는 알았다
할아버지가 속주머니에서 꺼내주던 말라비틀어진 참깨강정 하나를 오래오래 씹으면 단물로 환해져서
슬픔도 잠깐은 물러서곤 했다
족발 털을 밀어 가게를 꾸린 할머니가 형의 수학여행 때 주려고 참기름병 밑에 숨겨놓은 거금 일만 원을 쌔벼
강경극장까지 달렸던 적도 있다
칭찬할 사람도 없는 우등상장을 소룡리 저수지에 꽃잎처럼 흩뿌리면
하나둘 모여든 사람의 얼굴을 한 참깨들이 뻐끔거리곤 했다
하나의 참깨에는 한 알의 시간들이 가득 차서 늙은 어머니의 검버섯도 저리 많은 설움들로 몽글몽글 피어나는가
아직도 내 호주머니에는 참깨가 서 말이고 하루에 한 알씩 씹을 때마다
보이지 않던 것들과 들리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맑고 밝게 들어차는 것이다
(그림 : 이정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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