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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현 - 배추 겉잎시(詩)/시(詩) 2021. 2. 8. 15:16
배추밭에서 배추를 딴다
흙 묻고 누렇게 색이 바랜 겉잎은 떼어내 버린다
집에서 다듬을 때는
지나쳐도 그만일 상처 굳이 찾아내 떼어내고
어릴 때 한없이 파고들었던
어머니의 무명치마 같은 짙푸른 겉잎은
뻣뻣하다며 또 떼어 낸다
종량제 쓰레기 봉짓값 아깝다고
마누라 앉은키만큼 쌓인 배추 겉잎을
집 모퉁이에 버린다
월례 누님네 집과 우리 집의 바람벽 사이
길고양이나 드나드는 길, 그러다가 가끔 똥이나 누는 길
겨울이면 무딘 바람 기어들었다가 날 선 바람 되어 나오는 길
눈 내리면 쌓이다가 녹고, 녹다가 얼고 그래서 겹겹이 얼었다가
봄이 되면 해동이 되는 길
어디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 왔는지
여름에는 머위 그늘뿐인 길
머윗잎 몇 장 머윗대 몇 모숨 잘 꺾어 먹을 요량으로
배추 겉잎을 집 모퉁이에 버린다
남들 눈에 띄지 말라고 모퉁이에 버린다
바람벽 같았던 겉잎을 바람벽 사이에 버린다
(그림 : 박양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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