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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국 - 찌그러진 밥통시(詩)/시(詩) 2020. 8. 13. 18:00
북경반점 철가방이 길 한가운데 나뒹굴었다
지고 있는 낙엽과 슬쩍 부딪쳤을 뿐인데
멀리 북경에서 문경 흥덕동 뒷골목까지 튕겨졌다
짜장면이 중앙선을 침범하고
짬뽕 국물을 신호등 건너 안경점까지 튀겼던 열아홉 살 배달부
살아오면서 세상을 한번 이렇게 뒤집어엎긴 처음이었다
길가 수북이 쌓인 낙엽들은 속수무책이었지만
아스팔트 위 눈빛 범벅의 면발을 묵묵히 긁어 담는 배달부
그렇지, 밥통 뒤집어지면 세상 못할 게 없지
먼 훗날
저 찌그러진 철가방에서 나뭇잎은 돋을 것이다
아스팔트에 깊게 뿌리 내린 쫄깃한 면발이
가지를 뻗고 싹이 나고 꽃 피울 것이다
새들은 면발을 늘려 집을 짓고 새끼를 칠 것이다
그 날갯짓에 낙엽은 또 지고 오토바이는 넘어지고
찌그러진 밥통은 그렇게 천천히 펴질 것이다
(그림 : 방정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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