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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인 - 여수 집시(詩)/시(詩) 2020. 8. 12. 18:28
가끔 여수 집에 간다
가보면 집은 혼자 놀며 잘 살아가고 있다.
전에는 여수항이 잘 보였는데
뒤꿈치를 들어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 뱃고동 소리만 들린다며 투덜댄다.
갑자기 여수 집에서 연락이 왔다.
가보니 대문을 잠그고 두문불출, 한쪽에
잡초들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 잡생각들을 뽑아내고 집 안을 다독여 주자
긴 하품을 하며 깨어났다.
요즘은 벽화마을로 꽤 유명해져서
여행객들이 대문 앞을 떠들며 지나간다고 좋아한다.
벽화는 저 아래 바닷가 쪽에서 위로
들불처럼 번졌다.
집도 이제 혼자 사는 것이 지겨워지는 모양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볼에 연지를 찍듯이
시린 옆구리에라도 그림 한두 점 걸어놓고 살면
그런데로 멋있어 보이고
기웃거려 주는 사람도 있어 심심하지 않을 테니까
여수에 자주 못 가서 늘 미안하다.
앞집에 가려진 여수항이나 바라보며
슬픈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집
온기를 많이 들이고 싶어
가슴에 방을 많이 달고 살아가는 집
사랑이라도 한번 밝게 켜보아야 할 텐데
구경꾼처럼 계단 많은 긴 골목길을 한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만 성급하다.(그림 : 차일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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