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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혁웅 - 국수
    시(詩)/시(詩) 2020. 6. 28. 15:47

     

    넓은 마당 옆에 국수집이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 이모네 집이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나를 그리로

    마실 보내곤 했다 우리는 국수보다 삼양라면이 좋았는데

    이를테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는

    상을 엎었던 것인데 국수 뽑는 기계는 쉴새없이 국수를

    뽑았다 동어반복을 거기서 배웠다 목포는 항구고 흥남은

    부두지만 국수는 국수다 국물을 우려내는 멸치처럼 나는

    작았고 말랐고 부어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국물 속을

    헤엄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좋아요 형님, 다신 안 와요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거길 떠난 후에 내가 먹은 국수는 어머니가 반죽해서

    식칼로 썰어낸 손칼국수다 면발이 빼뚤빼뚤해서 이모네

    국수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한다 그때

    내가 좋아한 건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번데기 리어카와

    솜틀집 문에 치어 죽은 병아리 그리고 전도관의 풍금소리,

    결단코 국수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도 눈이 내렸다

    밀린 연탄재를 한 길에 내다버릴 수 있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눈, 국수가 나올 때 그 위에 뿌리는 밀가루

    처럼 하얗고 퍽퍽한 그 눈, 우리는 면발처럼 줄줄이

    넓은 마당에 나오곤 했던 것인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진하게 우려낸 하늘은 무엇인가 번데기처럼

    구수하고 병아리처럼 노랗고 풍금의 건반처럼 가지런한

    이것은 무엇인가

    (그림 : 허영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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