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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둘 -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에 들어가 보니시(詩)/시(詩) 2020. 5. 2. 17:14
처마 끝에 달 기울어 물속처럼 밤이 깊다
이따금 물방울 튀기듯 풀벌레 우니
석류 익는 담장 너머로 파문이 청량하다
담 모퉁이는 비밀을 키우기 좋은 장소
초롱불을 들었으나 갸륵한 불빛은
두 사람의 밀회를 전부 들추지 않는다
지상은 혼곤한 잠 속에 들고 먼 하늘에 별들 아련한데
스치듯 비껴가는 여인과 나의 눈길
먼지 낀 세월 사이로 별이 쏟아진다
물빛 쓰개치마 쓰다듬던 달빛이
여인의 눈꼬리 근처에서 교태를 더하니
사내의 도포 자락이 바람도 없이 흔들린다
묶어 올린 치마폭은 연심으로 부풀고
보얀 속곳과 오이씨 버선 위에서
화원의 은밀한 떨림도 만난다
밤은 애틋하게 익어가고
연정은 어스름 달빛에 녹아
사위가 몽롱하다
아득한 세월의 봉인을 열어 그들과 조우했으나
내가 읽은 것은 담벼락에 담긴 몇 줄 글귀뿐, 두 사람의 비밀한 내력 한 자락 읽지 못했다
어디로 향하는 걸음인지 사내의 가죽신은
어느새 마음 이끄는 곳으로 향하는데
따를 듯 말 듯 몸을 튼 여인의 자태가 야릇하다
달은 두 사람을 비추는 일로 은근하고
나는 저무는 달이 위태로운데
적막 속 스며든 안개만이 무심하다
(그림 : 혜원 신윤복)
James Last - Romance in F minor Op.5
(Tchaiko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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