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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시큰거리려니
그 캄캄함이 외려 따뜻한 순백을 켜드는 걸,
세상은 한결 새벽으로 기울어져 저 눈발
오래 어루만져 이튿날 아침 햇살 속으로 내보내리라
한 힘이 수만 흰 염소떼 몰고 왔다가
평원 자욱하게 거느리고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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