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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 나오던 생기,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까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고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그림 : 이운갑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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