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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서 동화책 읽고 있던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할아버지는
무슨 보물이라도 보여주려는 듯
창문에 늘어진 속 커튼을 젖혔다
창턱에는 난초 화분이 네 개
그 가운데 하나가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하얀 줄기에 샛노란 꽃잎
난초꽃 향기가 그윽하지 않으냐
난초가 들으면 안 되는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말했다화분에 심은 풀잎처럼 보이는 난초에
흥미 없는 손자 녀석은 시큰둥하게
힐끗 쳐다보고
별것 아니라는 듯
횅하니 거실로 되돌아가 멈추었던
컴퓨터 게임을 계속했다
작은 손가락이 나는 듯 움직였다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옛날의 손자는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머쓱해졌다
녀석이 나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림 : 김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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