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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경주에게는 불국사로 간다는 버스가 있어서 낙서하듯 몸 하나가 덜컹거려도 긴 이야기가 된다
지나쳐온 정류장들도 기와를 얹은 집 모양을 하고 있다
낯선 길에 내려 찡그린 얼굴을 햇살에 새기면 시월은 몇 층짜리인지 헐리지 않도록 바람 속에 쌓은 돌
그 돌 위에 돌을 쌓으며 좁아져가는 생애가 내 발자국들을 죄다 모아서 석탑 위에 얹어준다
내 이름은 탑이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갈 만하다고
하지만 박모의 하늘에
매일 조금씩 덧칠해온 얼룩 하나가 붉게 떠서
오늘밤에 나는 불국에 이르지 못하고
왕릉 곁의 막걸리집에 국물 자국처럼 앉으면
경주의 밤은 속을 알 수도 없는 탁한 술을 마신다
깊어가는 어둠을 시큼하게라도 맡을 수 있는 곳
평생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뿐이란 걸
흠집이 많은 술집의 탁자에게 배운다
그러면 내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경주
뒤를 돌아보면 경주는
누구에게나 늘 그리운 오늘이다
(그림 : 이팔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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