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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 - 비 오는 날 국숫집시(詩)/시(詩) 2019. 5. 18. 23:06
소낙비 후들기는 말복날 오후
보양식당 찾아가던 발길 멈추고
서문시장 좌판에 엉덩이 비집고 앉았다
있을 건 다 있다는 시장바닥에서
냄비 속 물꽃 필 때
콩가루 뿌린 뭉텅이 국숫발 넣었다 건져낸
국수 한 그릇 앞에 놓았더니
금천네 사연이 길다
아홉 살 적 어미 손에 끌려 피난 내려와 열세 살 무렵
시작한 식모살이로 오라비 학비 보태다가 찐득한 반죽 홍두깨로 밀어 썰어낸 뒤
장작불에 다시물 팔팔 끓이던 손맛 이어받은 오늘까지 지나간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 처럼,
미루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땅따먹기하던
동갑내기 친구들 꼭 한번 보고 싶단다
황시미기 깔딱고개 너머
등굣길에 맞닥뜨리는 산모롱이 행상집이 무서워
새터마을 비탈길로 빙빙 돌아갈 때
뒤통수까지 귀신이 따라온다고
책 보따리 둘러메고 냅다 뛰던
그 길 다시 걸어보고 싶단다
줅줅 산비알 너덜바위 다래잎에 떨어진 빗방울같이
미끄러지고 엎질러지며 흘러간
지난 시절이 보고싶단다
후룩, 후루룩
천막지붕에 늦여름이 떨어진다
(그림 : 김제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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