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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삼거리엔 구멍가게 하나 있는데요
가게나 점방이라는 간판도 없이 한 사십여 년 장사하는 집인데요
팔순인 월평 할머니가 하루에 과자나 두어 봉지 파는 곳인데요
물건 사러 온 손님이 가격표 보고 알아서 돈 주고 가고
외상값 같은 것도 알아서 머릿속에 적어 넣어야 하는 곳인데요
전에는 하루에 막걸리 두 말도 팔고 담배도 보루째 팔았대요
글 모르는 월평 할머니와 글 모르는 손님이 만나면
물건값이 눈대중으로 매겨지는 집이기도 하지요
물건값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쓸 사람이 정하는 것이라는
월평 할머니의 경제학이 통하는 곳이기도 한데요
가격표 같은 것은 그저 참고 사항에 불과한 것이고요
낱돈 없는 날에는 구백원짜리가 천원짜리가 되고
천이백원짜리도 천원짜리가 되어서
그냥 천원집이라고 불리는 집인데요
한 십년 묵은 외상값이 부조금이 되기도 하는
천원집이 있기는 있었는데요(그림 : 이미경 화백)
Wayne Gratz - An Affair To Re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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