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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 보수동 골목시(詩)/시(詩) 2019. 4. 7. 11:38
절판된 길을 읽습니다
읽다가 접어놓은 흔적으로 두툼한 한 권,
로맨스소설이고 싶었으나
그의 생은 고딕체
딱딱한 문장으로 나열되었습니다
최초의 독자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죠
한 단락 안에서 줄거리 없이 살다
장문의 봄,
별이 되어 각주로 매달렸다죠
겉장의 시대를 지우고 수명을 다한 날들이
좁은 장지(葬地)에 몸을 뉩니다
변하지 않는 자세로 바닥에 깔린 역사서
구겨진 가슴이 기운 세계를 받치고 있습니다
부록 같은 자식들은 곁을 떠나고 없지만
책장 어디쯤 민들레 한 송이 피어있을,
저 두꺼운 몸을 빼내면
지구 한 귀퉁이가 무너져버릴지도
양장의 날개를 펼친 책들이 페이지를 벗어나
어느 문맹의 별을 반짝일지도 모릅니다
어깨 접힌 골목에 밑줄을 긋는
저녁의 행간
늙은 개척자의 목차에서 길을 찾던 바람이
한 장, 보수동을 넘깁니다
보수동책방골목 : 부산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사거리 건너편에서 보수동 쪽으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책방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을 보수동책방골목이라 한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난민들은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부산소재 학교는 물론 피난 온 학교까지 구덕산 자락의 보수동 뒷산에서 노천교실·천막교실 등을 열어 수업을 하였다.
이에 보수동 골목길은 수많은 학생들의 통학로로 붐비게 되었다.
다른 피난민들이 가세하여 노점과 가건물에 책방을 하나둘 열어 책방골목이 형성되었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수많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책을 내다 팔고, 헌책을 구입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신학기가 되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때때로 희귀본이나 값진 개인소장 고서도 흘러들어와 지식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림 : 박경효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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