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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협 - 정동 산책시(詩)/시(詩) 2018. 9. 20. 11:40
라일락이 시작되었어
목발 짚은 회화나무 그늘을 지나왔어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빗방울이 시작되었어
턱을 괴고 무릎을 기대고 있었어
사람들은 모두 한쪽 방향에서 온다
죽은 작곡가의 기념비에선 노래가 흘러나왔지
거울에 얼굴을 대고 휘파람을 불었어
어떤 시간의 내가 가깝다 흐려졌지
94년산(産) 바람 냄새가 났어
교회의 장미 담장을 넘겨다보았고
갈래 길에선 종교를 가질까 생각해 보았지만
라일락이 시작되었어
신이란 문득 코밑을 지나는 그리운 냄새 같은 게 아닐까
그걸 매일 기억하는 일이 기도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빗방울이 시작되었어 흙냄새가 올라와
꽃 냄새를 덮고 하늘은 한층 어두워졌어
담배를 끊었지만 나는 자주 연기 속에 있었고
광화문 구름 밑에 검은 거인은
길을 돌아가면 어른이 된다고 했지
(그림 : 양종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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