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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가방 속을 걸어나와
길 안으로 사라졌다
이 낡은 여행가방, 서른과 스물
끝없이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마흔에도
옆구리에 단정히 붙어 있었다
가방으로부터 해방된 저녁
정거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추억들이
어둠과 부딪히며 소스라치곤 했다 가방 속
손거울로 과거를 비추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가방은 입을 열지 않았다
위경련에 시달린 날 거리에는 입 벌린
눈 번뜩이는 무수한 가방들이 보인다
그럴때면, 늑골 속
단단하게 굳어진 길 하나가 만져진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시 가방으로 들어간다
곧 문이 닫히고
그를 둘러싼 촘촘한 길들이 일제히 지워졌다
머리맡에 잠든 수없이
눈물로 채우고 엎지른 적이 있는 가방
어안이 벙벙해진, 말 잃은 가방이 늘어간다
(그림 : 김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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