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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물항의 길시(詩)/정일근 2018. 7. 5. 15:02
쓸쓸해지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 있다
물항이 그런 곳이다, 물항의 길이란
낮이면 종종걸음으로 달아나 버리고
밤이면 느릿느릿 비린 내음으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낮에 내가 잡은 것들은 헛것이고
밤에 내가 껴안은 것들은 모두 깨어진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물항의 길 위에서 누구나 자유로우나
자유로운 만큼 쓸쓸하다, 부정하지 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물항의 골목길을 풀어가다
연금술사의 접시 안에 타고 있는 물내음 맡았다면,
또 검은 소를 끌고 가는 늙은 순례자가
하얀 맨발로 밟는 물소리 들었다면, 그 때
저녁 거울에 비친 물항의 길을 보았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처럼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그 길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돌아가는 곳을 알고 있다
은어가 회귀하는 마지막 강처럼
돌아가는 그 마지막 길을 알고 있다
가벼워져 찾아온 사람들이
무거워져 물항을 떠나가고 있다
물항의 길이 둥근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언제나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고, 둥근
물항의 길 위에서 오래 헛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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