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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흑백다방시(詩)/정일근 2017. 9. 5. 22:38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뜨거워진다면
흑백다방, 스무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상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닐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터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뜨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 곳.
나는 그 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omento mori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 속의 흑백 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momento mori : 언젠가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라틴어)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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