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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미루나무시(詩)/공광규 2018. 5. 24. 10:17
앞 냇둑에 살았던 늙은 미루나무는
착해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서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의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엉엉 울거나 한 여름 사춘기처럼
잎새를 하염없이 반짝반짝 뒤집었지
미역 감던 아이들이 그늘에 와서 놀고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들을 기대어 놓고
낮잠 한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 것에도 못쓴다며 무시당했지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 갔던 나무
아주 오래오래 살다 천명을 받고 폭풍우 치던 한 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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