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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풍산국민학교시(詩)/안도현 2017. 12. 23. 21:10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 하던 그 아이들은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 놓고갔다는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매일 밤마다 밀린 숙제가 잠끝까지 따라 들어오곤 하였다
붉은 리트머스 종이 위로 가을이 한창 물들어갈 무렵
내 소풍날은 김밥이 터지고 운동회날은 물통이 새고
그래 그날 주먹 같은 모래주머니 마구 던져대던 폭죽터뜨리기
아아 그때부터였다 청군 백군 서로 갈라져
지금에 이르고 감추어둔 비둘기와 오색 종이가루를 찾기 위하여
우리가 저 높은 곳으로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데 소식도 없이 기러기 기러기는 하늘에다 길을 내고
겨울이 오면 아이들은 변방으로 위문편지를 쓰다가
책상 위에 연필 깎는 칼로 휴전선을 그었다
그 부끄러운 흔적 지우지 못하고 6학년이 되었을 때
가슴속 따뜻한 고향을 조금씩 벗겨내며 처음으로
나는 도시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고 계집애
고 계집애는 실처럼 자꾸 나를 휘감아 왔다(그림 : 정지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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