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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현 - 을지로 순환선시(詩)/시(詩) 2017. 12. 17. 13:58
옛사랑을 닮은 여자를 바라보다가
을지로입구역을 그냥 지나쳤다
내리지 못하고
오후 세시의 전동차 안은
한숨과 하품의 교대로 입을 벌리고 있다. 사람들은
쭈그리고 앉았거나 기대어선 자세로내려야할 역을 생각하고, 더러
덜 익은 그들의 꿈을 헤아린다, 너무
오래 흔들리고 살아왔던 거다
유리창에 비친 어제이거나 혹은 내일일
표정과 표정이 겹쳤다가 쉬이 흩어진다
힘겨움에 살짝 데쳐진 얼굴들에선
생선을 끌어올리던 그물냄새가 나기도 하고
노을 밭에 앉아 콩대로 삶을 조율하던
고향의 기억 설핏 묻어있기도 하다
희망을 꺼내 오래도록 삶으면
저런 거친 표정들이 될까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백일홍꽃씨 툭툭 벌어지듯
잠시 눈 맞춘 표정들이 바람에 실려 나간다
사랑했던 세월이 한 시절이듯, 다시
전동차는 달리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순환선 전동차
세상에 제 생각대로 잡아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된다고
모두들 너무 오래 움켜쥐고 살아온 거다
무거워 무거워
추억도 시간이 지나면 짐이 되고 마는 건데
옛사랑을 닮은 여자를 바라보다가
신도림역까지 오고 말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하오(그림 : 문윤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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