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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 나는 네가시(詩)/시(詩) 2017. 12. 15. 12:30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너를 닮은
물렁물렁한 시냇물, 우르르 떨어지는 큰 꽃잎들,
달빛 아래 늘어진 길고 긴 밤 고양이의 그림자,
꿈속의 바다. 그리고 고무지우개.
그런 것만 있었으면 좋겠다.나는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네가 없을 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네 모든 것에 어찌할 수 없도록 얽매인
불행이라면 좋겠다.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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