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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종기 - 가을, 아득한
    시(詩)/마종기 2017. 10. 26. 11:09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 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
    화가 마티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까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다비)에 부처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 냄새 가볍게 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

    (그림 : 박락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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