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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나의 조용한 이웃들시(詩)/이기철 2017. 8. 4. 23:23
풀뿌리가 이룩한 세상 속에 집을 짓고 그만 들어앉을까 다섯 번 생각했습니다
벌레의 도제가 되어 한 일 년 햇볕 서까래 거는 법을 배울까 석 달 동안 바장였습니다
아직 못 읽은 스무 권의 책과 멀리서 온 편지 따윌 얹어놓을 시렁과
쟁반과 간장종지 씻어놓을 선반은 아무리 오막집이라도 빠뜨릴 수 없겠지요
어떻게 살아야 여치 메뚜기에게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민들레 채송화는 내 집짓는데 한 봉지의 색깔밖엔 보태 줄게 없다고 조아리네요
가을 오면 귀뚜라미에게 밤마다 해금 탄주를 배울 요량입니다
옹두리에 담기는 달빛에게 인사를 빠뜨려서는 안 되니까요
붉지 않으면 피지도 않겠다고 고집하는 석류꽃에겐
꿈꾸는 것만 허용되어도 고맙다고 인사하겠습니다
노랑나비에게 빌려줄 마당 두 평이 있는 한
나는 마음의 대사립 닫지 않으려 합니다
감람색 하늘 한 자락을 빌려 입고 오전엔 나무동네를 문안하고 올까합니다
오다가 넘어진 풀 대궁이 있거든 부목을 대주고 오겠습니다
나의 조용한 이웃들에게 이 헌사를 바친 사람이 절대로 나라는 걸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바장이다 : (사람이)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자꾸 조금씩 머뭇거리다.
대사립 : 대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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