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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 영이가 있던 날시(詩)/김광규 2017. 7. 8. 23:22
동인동 뒷골목을 지나다 보니
옛날의 기와집 그대로 있고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에는
서투르게 그려 놓은 마징가 제트
지금도 낙서가 여전하구나
개구장이 꼬마들이 30년을 그려 온
붉은 벽돌 담벼락의 재미있는 낙서를
지우고 또 지우면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먼 옛날 어린 시절
커다란 대가리에 가느다란 손과 발
백묵으로 그리다 만 영이의 솜씨
문어처럼 생긴 화성인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아빠되고 영이는 엄마되어
소꿉장난하다가 싫증이 나면
영이는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철수 바보 똥개
쫓아가서 지우면 화살표를 끌며
저만치 도망가서 영이는 백묵으로
화성인을 또 한 마리 그려 놓았다
쫓아가서 지우면 도망가서 그리고
쫓아가면 도망가고 지우면 그리고......
영이를 쫓다가 오후를 보낸 날은
꿈 속에서도 약이 올랐다
어린 시절 되새겨 보니
아무래도 무엇인가 놓쳐 버린 아쉬움
영이의 낙서를 지우려 하지 말고
영이의 몽똑한 예쁜 손에서
그 하얀 백묵을 빼앗아야 했던 건데.....
이제야 깨달은 먼 옛날의 어리석음
너무 빨리 크는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지
자라지 않는 어른들은 그것을 모르지(그림 : 이혜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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