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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율리, 율리시(詩)/강인한 2017. 4. 27. 03:26
어두워진 겨울의 차창에서 불빛은 섬처럼 떠오르고 있었어.
스물다섯 살 아무렇게나 깊어진 내 청년의 골짜기
빨간 루비의 꽃들은 흰 눈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어, 율리.
야간 버스의 흐려진 유리창에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썼어.
내 손끝에는 웬일로 당신의 은백의 슬픔이 묻어나고
긴 눈이 내리는 밤 더운 차를 홀로 마실 적엔
추녀 끝에 매달린 날카로운 고드름의 촉
방울방울 맺히는 당신의 불면을 나는 가만히 엿들었어.
겨울 산에서 함께 돌아오던 날 내 몸 속의 잔신경들이 풀어져
흐르는 것을 보기도 하였지만
눈 속엔 더욱 차고 말간 환상의 꽃잎들이 흐르고 있었어.
품어볼 어떤 야망도 없는 시대
세상의 구석진 어느 곳에서는 힘차게 힘차게 평화만이 무너지고 있는 때
율리, 당신은 까만 외투 깃을 세우고 찬바람 속에 웃으며
겨울을 나야 하는 작은 새처럼 쓸쓸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말하여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음악보다 낮게 당신은 글썽거렸어.
문 닫힌 겨울 찻집 앞에서 길길이 얼어붙은 분수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나는 깊어져버리고
율리, 율리, 내 가슴 속으로는 끝없는 눈다발이 펑펑 쏟아져내렸어.
(그림 : 남택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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