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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비오는 날에 오는 저녁시(詩)/하종오 2016. 7. 27. 19:39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등꽃을 때리면 저녁은 등꽃을 감싸네
묵정밭 보이는 마루에 앉아서 밥 먹다가 눈 깜박이네,
꽃잎들 폴폴폴 다시는 수저를 들지 못하겠네
입가심도 하지 않고 등나무 밑으로 가서 어스름에 젖는 빗방울에 젖어
빗방울에 젖는 어스름에 젖어 낙백(落魄) 십 년 보네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밭으로 스며들면 저녁은 밭으로 내려앉네
빗물 고이면 일이 년 전에는 흙 묻은 아랫도리옷 빨고 삼사 년 전에 밥그릇 씻었네,
밤 되기 전에 묵정밭 물끄럼 보다 비 그치면 갈아엎고 뿌릴 풋나물 씨앗값 속셈하네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마당으로 흐르면 저녁은 마당에 가만히 있네
빈 주머니에 손 넣고 마당 걷네.
해마다 알곡 거두어들여도 늘 비어 있던 집 안 구석구석에 간만에 차고 넘치는 빗소리 듣네.
저녁도 가득하여서 어둠 출렁거리며 내쉬는 가쁜 숨소리 듣네.
가슴 흥건하여서 마루에 올라 앉네
비가 오는 날에도 저녁은 오네
비가 처마 아래로 떨어지면 저녁은 처마 위로 올라가네
밥상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전등 켜네
적막이 훤하니 그걸 낙백한 은둔자의 전 재산으로 알아서 빗물이 집 떠받들고 어둠이 집 드네
몸 가누지 못해 다신 비도 보지 못하고 저녁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드네
낙백(落魄) : 뜻을 얻지 못하여 처지가 곤궁해 짐을 비유한 말(그림 : 전성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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