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나희덕 - 숨비소리
    시(詩)/나희덕 2016. 6. 7. 16:01

     

     

     

    이따금 첫 물질을 나갔을 때 생각이 나.

    처음엔 너무 무서워 태왁만 꽉 붙잡고 있었지.

    갑자기 등 뒤에서 어떤 손이 나를 밀어넣었어.

    그런데 바닷물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이상한 해방감마저 느껴졌지.

    푸른 피를 흘리는 거대한 짐승 속에서 내 피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 같다고 할까.

    그날부터 바다의 피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았지.

    휘이- 휘이- 휘이- 휘이- 숨비고 숨비고 숨비면서 건너는 한 生.


    둥근 수경을 통해 본 바다는 둥글지 않아.

    잘게 부서진 파도는 유리조각처럼 날카롭지.

    투명하지만 차갑고 단단한 물결들.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들이 있듯 물결에 부딪쳐 죽는 고기들도 있지.


    어제의 피로가 잠수복 속에 아직 남아 있어.

    오늘의 피로가 어제의 피로와 만나 피워내는 냄새.

    탄산가스. 만성두통. 약간의 구역질. 근육마비. 어깨에 박힌 돌멩이 두 개.

    망사리에 가득한 조개들. 돌멩이처럼 흔한, 돌멩이처럼 무거운 조개들.

    조개는 조개를 낳고 조개는 조개를 낳고......

    조개를 캐는 동안 몸은 석회질에 점점 가까워지지.

    어제의 피로는 오늘의 피로를 낳고 오늘의 피로는 내일의 피로를 낳고......

    그래도 익사할 수 없는 것은 어깨에 박힌 두 날개 때문이야.


    매일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지.

    검은 물갈퀴는 어둠을 가르고 어제보다 더 멀리 내려갔지.

    우리가 죽음의 아가리라고 부르는 그곳까지.

    싸이렌들이 빛 속에서 나풀거리는 곳, 몇번이나 넘고 싶었던 그 문턱에서 가까스로 돌아와 휘파람을 불어.

    휘이- 휘이- 휘이- 휘이- 내 속에 살고 있는 물새 한 마리.

    숨비소리 : 해녀가 잠수 후 수면에서 고단 숨을 휘파람처럼 쉬는 행동

    (그림 : 채기선 화백)

    '시(詩) > 나희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희덕 - 빗방울, 빗방울  (0) 2016.08.29
    나희덕 -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0) 2016.06.24
    나희덕 - 밤, 바람 속으로  (0) 2016.05.25
    나희덕 - 내가 마실 갈 때  (0) 2014.06.19
    나희덕 - 구두가 남겨졌다  (0) 2014.06.19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