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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재휘 - 슬픈 박모(薄募)
    시(詩)/심재휘 2015. 10. 27. 22:06

     

     

    가을 저녁의 해는 항상
    우리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져버립니다
    그러면 어두워지기 전에
    사람들은 서둘러 사랑을 하고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낡은 구두를 벗고
    손자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서툴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해 지고도 잠시 더 머무는 저 빛들로
    세상은 우리의 눈을 잠시 미숙하게 하고
    낮과 밤이 늘 서로를 외면하는 이 시간이면
    강변대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흐르는 강물을
    아직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어디론가로 무섭게 달려가는 차들을 보며
    이루지 못하였던 한때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보이지 않는 빛을 머금고
    자꾸만 멀어져가는 저 구름들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는 졌지만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기는 세상이
    눈을 뜨거나 혹은 감아도 자꾸만
    어쩔 수 없이 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해 지고 아주 어두워지기 전
    언제나 내 마음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박모의 머뭇거리는 밝음이 어둠보다도 더욱
    나의 시력을 아프게 할 줄 알았더라면
    해 지고 바로 어두워질 걸 그랬습니다

    박모(薄募) : 땅거미. 해가 진 뒤로 껌껌해지기 전까지의 어둑어둑한 어둠.

    저녁의 어둠의 시작으로 땅거미라고도 한다. 일몰과 혼동되곤 한다.

    하늘은 일반적으로 일몰후에도 잠시 밝고 푸르다. 이 기간은 박명이며 박모는 저녁 박명의 끝이다.

    (그림 : 진상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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