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되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 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燈)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거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은동곳 : 상투를 튼 뒤에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은으로 만든 동곳
산호 관자 :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
무곡(貿穀) : 이익을 보려고 곡식을 많이 사들임
콩실이 : 콩을 싣고 다님
둥글소 : 황소, 수소
싸리말 동무 : 어렸을 때 마마를 함께 앓으면서 싸리말을 타고 나았던 동무
‘싸리말’은 싸리로 조그맣게 결어 말처름 만든 것으로, 마마에 걸린 지 12일 되는 날 역신을 쫓아낼 때 쓴다. ? 배송마(拜送馬)
짓두광주리 : (함경방언) 바늘, 실, 골무 같은 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 반짓고리
저릎등 : 저릎의 표준어인 ‘겨릅’은 껍질을 벗긴 삼대이다. 저릎등은 삼대를 태워 밝히는 등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 스님. 옛날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갓주지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했음
아라사(俄羅斯) : 러시아의 음차 ? 아국(俄國)
글거리 : (함경남도 방언) 그루터기(그림 : 전성기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경희 - 말복(末伏) (0) 2015.06.16 이원수 - 찔레꽃 (0) 2015.06.16 정병근 - 희미한 것들에 대하여 (0) 2015.06.15 임재춘 - 가을 저녁 (0) 2015.06.15 이정화 - 망양정 (望洋亭) (0) 201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