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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악 - 낡은집
    시(詩)/시(詩) 2015. 6. 15. 23:20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되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 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燈)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거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은동곳 : 상투를 튼 뒤에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은으로 만든 동곳
    산호 관자 :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
    무곡(貿穀) : 이익을 보려고 곡식을 많이 사들임
    콩실이 : 콩을 싣고 다님
    둥글소 : 황소, 수소
    싸리말 동무 : 어렸을 때 마마를 함께 앓으면서 싸리말을 타고 나았던 동무
    ‘싸리말’은 싸리로 조그맣게 결어 말처름 만든 것으로, 마마에 걸린 지 12일 되는 날 역신을 쫓아낼 때 쓴다. ? 배송마(拜送馬)
    짓두광주리 : (함경방언) 바늘, 실, 골무 같은 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 반짓고리
    저릎등 : 저릎의 표준어인 ‘겨릅’은 껍질을 벗긴 삼대이다. 저릎등은 삼대를 태워 밝히는 등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 스님. 옛날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갓주지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했음
    아라사(俄羅斯) : 러시아의 음차 ? 아국(俄國)
    글거리 : (함경남도 방언) 그루터기

    (그림 : 전성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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