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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경 - 저녁의 물국수시(詩)/시(詩) 2015. 6. 15. 00:18
어두운 저녁, 세상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죄다 잠들어갈 무렵이면
소리치고 싶은 나도 덩달아 기운이 빠지고 어느새 허기가 밀려옵니다
밀려오는 허기 속으로 나는 곤한 잠을 청하고
꿈속에서 큰 소리로 할매를 부릅니다
먼 길
익을 대로 익은 할매목소리는 물국수 한 그릇 내오는데요
도시서 큰 나는 이 백발의 순정을 후루룩 삼키기만 할 뿐
아무 맛도 없이 훅 불어나는 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불어나서 꽉 채우는 생
그 양감이 한 생애를 채운다는 것이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인데요
물국수의 눈으로 할매를 들여다보면
할매의 한 생도 국수가락처럼 갈라져
이제는 아무 맛도 없어져 버린 것이지만
메마를 대로 메마른 손주의 공복 사이로
미끄러지듯 불어나서
버즘 같은 이름을 적셔놓는다는 것이
햇살 피어오르는 한낮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물국수 한 그릇,
백발 사이로 흘러내리는 주름 같은 몸이
핏발 선 눈을 감기고 엉키듯 내 몸을 어루만져
어두운 저녁의 허기를 하얗게 채우는 줄도 모르고
물국수 볼 때마다 나는
물국수는 싫다 물국수는 싫다
경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림 : 허영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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