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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 빗방울에 대고 할 말이 없습니다시(詩)/시(詩) 2015. 4. 25. 09:36
상처 많은 사람처럼 자꾸만 부딪혀온다.
아무것도 담지 못한 생처럼 자꾸만 그렇게 부딪혀 온다.
세상은 그렇게 완강했다고 한없이 밀리는 나를 또 밀어댄다.
연두의 기억도 새들의 눈웃음도 맨드라미의 옆얼굴도 무엇 하나 적시지 못했는데
빈방들이 자꾸만 비명처럼 머리를 부딪혀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지상에 닿는 무게가 되기까지 살아냈어야 할 생이 있는 것이고,
당신의 얼굴에 내리는 빗방울은 모두 당신의 이야기,
당신이 처형한 사람들의 이야기,
더 할 말도 없으면서 자꾸만 나를 붙드는 마음 같아서 유리창에 대고 마구마구 편지를 쓰네.
불빛 두어 개 붙이면 누군가의 안부처럼 쓸쓸해질 테지.
나는 자꾸만 내 얼굴을 내어준다.
그것은 허공에 대한 이야기.
이젠 허공이 된 이야기.
앞으로 허공이 될 이야기, 그러므로 저 빗방울 속에 불을 켜두고 싶은 마음.
그 사이를 비틀 만한 것도 화해랄 것도 없었다.
낯섦만 깊어져 사이로 사이만 자란다고 어떤 힘만이 사이에서 갇혀 울기도 하였는데,
아주 먼 별의 뒷덜미를 볼 수 있다면 이 진부함이 좀 용서될까.
눈코입도 없는 얼굴을 씻다가 나는 무엇으로 울어야 하나.
(그림 : 전소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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