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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 딸꾹질의 사이학시(詩)/시(詩) 2015. 4. 18. 10:07
서울에서 방 한 칸의 위대함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월세 계약서를 앞에 놓고 주인은 거듭 다짐을 받는다
너무 시끄럽게 하면…… 딸꾹! 전기세는…… 딸꾹!
사나운 사냥개 어르고 달래듯
물 한 컵 단숨에 들이마시고 또 딸꾹!
숨을 한껏 빨아들인 주인의 입이 잠시 침묵하는 사이
불룩해진 아랫배가 딸꾹, 유세를 떤다
근엄한 입에서 딸꾹질이 한번 포효를 할 때마다
달동네 방 한 칸이 자꾸 산으로 올라간다
딸꾹질이 맹위를 떨칠수록 주인의 다짐도 조금씩 수위를 높여간다
서둘러 도장을 찍고 싶은 마음이
딸꾹질의 훈시에 맞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서울 쓰고 딸꾹! 서대문구 쓰고 딸꾹! 번지 쓰고 딸꾹!
사내가 주인인지 딸꾹질이 주인인지
계약서 한 장 작성하는 데 한 시간이 딸꾹,
여차하면 어렵게 찍은 도장마저 딸꾹질이 업어 갈 판인데 또 딸꾹,
딸꾹질의 폭력 앞에서 나만 점점 왜소해진다
아직 주지시키지 못한 다짐이라도 남아 있는 듯
딸꾹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인은 천천히 계약서를 훑어보고 있다
보증금을 건네는 손이 나도 모르게 딸꾹질을 한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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