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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 가만히 깊어 가는 것들시(詩)/장석남 2014. 11. 17. 13:37
가을이 와서 어느덧 깊어 가고 있습니다.
깊어 가다니요.
어디로 깊어 간단 말일까요.
가을 나무들은 길었던 푸른 세월을 마침내 붉은빛으로 익혀서는 내면으로 들입니다.
그리고는 긴 동안거冬安居에 임합니다.
마침내는 중심을 열어 청정한 나이테 하나를 얻습니다.
나무들은 그렇게 깊어지는데 우리들 인연의 여러 얽힘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깊어지는 걸까요.
벌레들은 밤새워 고요 속에다가 갖가지 수를 놓는 듯 싶습니다.
처음엔 몇 필匹 될 듯싶더니 지금은 그저 손수건 한 장쯤에 짜는 모양입니다.그만큼 밤도 깊습니다.
밤이 깊으면 병인 듯 이런저런 먼 곳의 일들이 궁금해지곤 합니다.
먼 곳의 빛과 소리들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밤이므로 길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창 앞을 서성이며 그렇게 그리워 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내 발길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그리움만이 갈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온 지 벌써 오래입니다.
당신 곁을 흐르던 강물은 여전하겠지요.
강물 속의 까만 돌들도 나란히들 누워 가을빛을 받아 어른거리고 있겠군요.
지난 여름 장마의 무섭던 물너울들을 넘기고는 한껏
깨끗한 정신으로 그렇게들 누워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흙과 나무와 돌들로 지어진 당신의 집은 어떻습니까.
세월의 한쪽 기슭에서, 호젓하게 세상살이의 여러 비밀들에
대해 근심하며 어떤 따뜻한 상징처럼 낮게 앉아 있을 당신의 집.
내가 종내는 당신과 함께 살다가 죽고 싶은 그집.
당신은 그렇게 거기 있고 나는 이 번잡한 구획의 한 모퉁이에서
쉬 떠날 수 없어 돌을 들여다보듯 내 그리움의 속살들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무엇인가를 삭히듯 돌 하나를 꺼내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할 무늬 같은 것들을 새겨넣어 보기도 합니다.
새벽녘 하늘엔 말굽만한 하현달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도 혹 보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시선 위에 내 것이 겹쳐진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울렁입니다.
그 울렁임의 무늬로 혹 이 가을이 깊어지는 것인지......
당신은 너무 멀리 있으므로 나는 그저 저 달에게
그리움의 수레를 매 놓고서는 마음만 뒤척일 뿐입니다.
꽤나 오랜 서성임입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가만히, 내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속으로 깊어 가는 것이 또한 있습니다.
달은 내 그러한 관념의 마을을 넘어서 마침내 당신에게 가 닿을 것입니다.(그림 : 박국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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